세종대왕 1~12 - 기린원(1993.04~1993.05)


- 월탄 박종화 지음


- "'전화, 상왕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제 아비를 죽이십시오.'

  임금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준 태종은 영의정에 오른 왕비의 아비를 시기해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젊은 세종은 결단코 피를 불러야만 하는 부친의 성격을 아는지라 왕비에게도 이를 말하지 못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을 후회한다. 그때 현명하고 눈치빠른 왕비는 상왕의 뜻을 꺾는 날, 조정은 다시 피의 역사를 거듭한다는 것을 깨닫고 왕조의 성업을 위하여 상왕의 뜻에 따를 것을 남편에게 권한다.

  '부원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면 폐비론이 대두될 것이오. 상왕의 분부를 받들어 왕비를 폐했을 때 마마는 어찌하겠소.'

  '일편단심 전하의 성업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축원하는 신첩이올시다. 궁중에 있으나 여염에 있으나 다만 왕실과 이 나라가 잘되기를 빌 뿐입니다.'


  월탄 박종화(1901 - 1981)의 대하소설'세종대왕'(기린원. 전 12권) 제 8권은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이윽고 부원군은 죽임을 당하고 가문은 멸문한다. 폐비의 신세를 모면한 왕비는 초막을 짓고 물러나 앉아 손수 후궁을 간택해 세종을 보살피게 함으로써 상왕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고 남편이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한다. 그렇게 해서 왕위찬탈을 위해 형제를 죽이고 아비와 아들이 칼부림을 해야 했던 조선왕실은 세종에 이르러 태평성대의 기틀을 다진다.  피흘림의 역사를 되풀이해야 직성이 풀리는 태종, 일찍이 그것을 간파해 미친짓을 함으로써 세자의 자리를 버리는 양녕대군, 인내와 도타운 믿음으로 위기를 넘기는 젊은 세종과 왕비 심씨, 다섯 명의 후궁을 두고 스물두 명의 자식을 낳은 남편을 자애롭게 뒷바라지해 우리 역사 최대의 인물로 만드는 왕비, 언제나 긍정과 창조의 정신으로 깨어 있어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는 세종. 70년대 후반 첫 출판된 후 곧 절판됐다가 93년 여름12권으로 재발간된 '세종대왕'은 월탄이 69세의 나이에 필생의 각오로 연재를 시작, 만 8년에 걸쳐 완성시킨 대하소설이다. 방대한 분량이라 읽어나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한 순간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역사 해석력과 민족문화 전반에 대한 탁월한 지식, 언어의 풍요로움과 휘감아도는 소설의 재미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궁중법도와 생활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이 옆자리에 설 작품은 단언하건대 아직 없다. 태조 이성계가 조락해진 고려 조정에 피를 뿌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서 시작해 세종의 승하까지를 장대하게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진미가 어떤 것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통치자의 면모와 인간적인 고뇌가 생생하게 묘파되고 인간들의 욕망과 계락이 전편을 달리며 역사의 거대한 게임을 드러낸다. 서술의 중언부언이 흠으로 보이긴 하지만 여러 인간 유형과 그 정신들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책장을 덮으며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한 역사소설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평 - http://nownforever.co.kr/xe/index.php?document_srl=23133&mid=gul_review에서 퍼옴)


- 단언컨대, 지금껏 읽었던, 조선시대를 기록한 소설들 중 최고의 소설이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역사와 궁중 생활, 고대 언어에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는 소설은 한 번도 못봤다. 마지막에 나오는 각종 삼국·고려시대 가사며 시조들을 비롯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등 두 번 세 번 읽으며 공부해야 할 법한, 고전 국어 교과서를 능가하는 수준의 내용도 대단히 많고... 역시나 각종 드라마며 영화의 단골 "원작"으로 채택될 만하다는 생각. 책을 읽는 목적이 "배움"이나 "교훈"인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초중반에 유난히 책에 오류가 군데군데 많이 눈에 띄었다. 태종 이방원이 큰아들 '제' 양녕을 제치고 강계 기생 출신 '가희아'에게서 낳은 아들 '비'를 세자로 삼으려고 고심하는 대목이 있는데, 뒤에 가서는 양녕이 이미 세자가 된 이후에 태종이 '가희아'를 만나게 된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가장 큰 오점.


- 또 하나 큰 오류는, 태조~태종에 이르는 조선 극초반에 이미 고추장 반찬이 밥상 위에 자주 오른다는 점. 임진왜란 전후에야 수입된 고추가 이미 고추장이 되어 조선 초기에 등장하다니! 뭐 이런 정도야 유난스레 "고증"을 강조하는 요즘에 들어서는 심각한 문제로 생각되지만 따지지 말고 그저 소설의 장치로 봐 줄만 하기도 하다.


"세자는 옹용한 태도추창전상에 오른 후에, 옥좌에 좌정해 앉으신 세종전하께 사배를 올려 사후를 드리고 미소를 지어 조용히 어전 지척에 시립했다.

  전하는 세자의 질서 있는 걸음걸이와 세자다운 전아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만족함을 느꼈다. 미소를 지어 화한 옥음을 세자에게 내린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먼저 올바른 예와 악을 정해서 국민의 문화를 높이고, 화한 기운으로 국가를 편안하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은 예로부터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 한 대목만 가져와 봤는데, 어마어마하다. 엄청난 한자어와 요즘은 전혀 사용되지 않는 고어(古語) 및 고려·조선시대 복식, 관직에 대한 명칭 등등으로 가득하여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 책이다. 12권 완독하는데 무려 4개월이나 걸렸다. 그렇지만 가끔씩 사전 찾아가며 몇 권 읽다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나중에는 이런 고전적인 표현들을 일상 생활에서 쓰고 싶을 정도로 중독됨. 10년만 젊었더라도 실제로 막 쓰고 다녔을 것 같다. ㅎㅎㅎ

 

- 마지막에 두 아들과 왕후를 잃고 슬픔에 젖어 방황하다 불교에 심취하는 대목에 이르자 나도 마음이 무겁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등 몹시 감정이입이 되었다. 실제로도 그렇게나 왕후에 대한 사랑이 깊었을까...


- 세종대왕뿐만 아니라, 그 왕후였던 소헌왕후 및 형들인 양녕, 효령대군도 대단히 존경스러운 인물로 묘사되어 있고 실제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들이다. 어릴 때 각종 위인전을 읽고 커가면서 드라마, 영화 등등으로 많이 안다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랐던 사실들도 상당하다. 대표적인 것이 난계 박연. 그가 아악 창제에서부터 "정음"을 만드는 일에까지 그렇게 깊숙히 개입되어 있는 비중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정말 처음 알았다. 그 밖에도 관습도감 여악 비오리며 기타 수많은 인물들... 그 중에 얼마까지가 진실이고 얼마가 허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의 극을 찍은 작품으로 꼽는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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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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