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는 정론지이다 ‘딴지일보’ 기사의 발랄함을 한 겹 벗겨내면, 그곳은 슬픔과 분노와 정의감의 거처다. 세계의 비참이 거기 웅크리고 있다. [125호] 2010년 02월 06일 (토) 09:08:20 고종석 (저널리스트)
‘딴지일보’에 처음 들어가본 게 김대중 정부 때였으니, 나도 이 신문의 낡은(그리고 늙은) 독자임에 틀림없다. 열성 독자는 아니었다. 그 책임은 내게 있었던 게 아니라 ‘딴지일보’에 있었다. 한 달 만에 들어가도 읽을거리를 찾기 힘든 적이 더러 있었다. 읽을 만한 기사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새로 올린 기사가 아예 없었다는 뜻이다. 그럴 양이면 처음부터 무슨무슨 ‘무크’라고 이름을 짓거나, 그게 아니면 ‘주보’나 ‘순보’나 ‘월보’라고 이실직고해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낮출 일이지, 밍밍하기 짝이 없는 ‘일보’라니. 몇몇 옐로페이퍼의 제호가 ‘-일보’로 끝나는 게 그렇게 탐스러웠나.
암튼 지난해 봄 어느 날부터 나는 하루 이틀 간격으로 이 신문을 들여다보는 충순한 독자(딴질러?)가 되었다. 딴지일보가 ‘매일 업데이트’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시도할 즈음이었다. 청춘을 바쳐서 ‘딴지’를 ‘일보’로 바꿔갔던 편집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매일 업데이트’라는 말은 과장인 것 같다. 며칠 살펴보니, ‘작은 기사 한둘이라도 가능하면 날마다 바꿀 것’ 정도가 새로운 편집 강령이었던 듯했다. 딴은, 그게 바로 ‘매일 업데이트’의 정의이긴 하다. 더구나 그만큼만으로도, 딴지일보는 ‘미션’을 ‘임파서블’에서 ‘파서블’로 바꿔놓았다. 몇 사람 안 될 게 분명한 딴지일보 편집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한편, 대뜸 ‘뭐 하러 이런 짓 했니?’라는 지청구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타고난 악성 ‘기계치’여서, ‘뉴딴지’가 제공하는 갖가지 서비스를 내가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 클릭, 저기 클릭, 여기저기 거기 클릭하다 보면, 이내 버젓한 ‘딴질러’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노무현의 때 이른 작고에 충격받아 편집진이 ‘매일 업데이트’를 선언한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숙고해온 ‘매일 업데이트’를 시작하려던 차에 노무현이 작고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노무현(과 김대중)의 작고와 ‘뉴딴지’ 플랜은 때와 틀을 엇비슷이 맞췄다. 내가 ‘딴질러화(化)’한 것도 대충 그 무렵이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궁금할 때 내가 기대는 매체는 조간신문 셋과 시사주간지 셋(거기에는 당연히 <시사IN>이 포함된다), 인터넷 신문 셋(당연히 딴지일보가 포함된다), 외국어 방송 둘이다. 그 외국어 방송 중 하나는 프랑스어 방송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 방송이다. 왜 이런 말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느냐고? 내가 프랑스어와 영어를 썩 잘한다고 잘난 체하기 위해서다(과연 푼수데기다, 나는!). 얼마만큼 잘하느냐고? <시사IN>을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프랑스어나 영어로 소리 내어 옮길 수 있을 만큼 한다. (검증 절대 불허!) <시사IN> 독자들이야 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의 중앙일간지 가운데 제호가 ‘신문’으로 끝나는 건 꽤 읽을 만하다. 반면에 제호가 ‘일보’로 끝나는 건, 딴지일보를 포함한 극소수 매체를 빼곤, 꽝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조간신문 셋’ 가운데 둘은 ‘일보’가 아니라 ‘신문’이다.
다른 매체들이 만들어낸 ‘세계상’ 과격하게 수정
그런데 요즘 나를 슬며시 유혹하는 게 있으니, ‘왜 아침에 종이신문을 봐야 하지?’ 하는 물음이다. 저녁 때 인터넷 신문들을 한 번 훑으면, 다음날 신문에서 얻을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더러 <시사IN>과 딴지일보(와 프레시안)만 읽고 세상 탐구를 마치기도 한다. 딴지일보가 설정하는 의제는 다른 매체랑 다를 때가 많다. 굽이치는 문체와 더불어, 그것이 딴지일보만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딴지일보 편집부에, 여느 신문사에는 없는 (마법사의) 수정구슬이라도 있는 걸까? 의제 설정의 싱싱함에서, 분석과 해석의 넓이와 깊이에서 딴지일보는 다른 매체들의 추종을 불허한다(하, <시사IN>은 빼고!). 이들 기사는 사건의 얼개만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 디테일을 촘촘히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다른 매체들이 만들어낸 ‘세계상’을 과격하게 수정한다. 그 ‘수정’이 바로 ‘딴지’다. 그 수정된 ‘세계상’이 늘 바르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딴지일보는 수많은 회원 독자들과의 피드백을 통해 일반 독자들의 판단을 돕는다.
딴지일보 기사들은 날래고 가벼운 한국어 문체에 무거운 세상사를 싣는다. 그 기사들의 발랄함을 한 겹 벗겨내면, 그곳은 슬픔과 분노와 정의감의 거처다. 세계의 비참이 거기 웅크리고 있다. 그러니 딴지일보는 그저 풍자 신문일 뿐이라고? 맞다. 그와 동시에 이 신문은 이 시대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론지’이기도 하다.
와하하하...
고종석씨도 나와 비슷하네. 나도 딴지일보를 열독하다가 새로운 꺼리가 없어서 안본 지 꽤 됐는데...
그러다 최근에야 무슨 계기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다시 읽어보게 된 것까지 정말 비슷하다.
(참고로, 나는 최근에 딴지일보에 매주 업데이트되고 있는 화성 관련 칼럼(?)에 푹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