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조상분들의 묘를 보고 뿌듯해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 어머님은 항상 저한테 ‘자네’라는 호칭을 쓰셨습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의 제게 ‘자네, 우리 집안에 정승이 3대째 끊긴 것을 아는가’라는 식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정운찬 총리가 지난 2004년 서울대 총장 시절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희 할아버지도 늘 저만 보면 ‘언제 강릉시장이 될래?’라고 하셨다니까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또 유학을 간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 하셨어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대학교수 오래 할 것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강릉시장이 모자라면 강원도 도지사를 해라’ 이러시더라고요. … 나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영문과에 간다니까 외삼촌 왈, ‘그거 해서 뭐가 되는데?’ 치과대학에 다니던 외사촌 형이 옆에 있다가 ‘영어 잘하면 미국 대사도 할 수 있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외삼촌이 또 말했어요. ‘그게 다냐?’”
지난 2005년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와 도정일 경희대 교수가 <대담>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현재 방영중인 <한국방송>(KBS) 드라마 ‘공부의 신’(유현기 연출)과 지난 1월에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스페셜 4부작 ‘출세만세’(남규홍 연출)를 재미있게 시청하면서 위에 인용한 세 분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그 이전에 정운찬씨가 총리가 되는 걸 볼 때에도 ‘정승이 3대째 끊긴’ 그의 집안 사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세! 이념보다 훨씬 강하고 진하고 질긴 한(恨)이다.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는 한국의 사회과학이 곧잘 빠지곤 하는 함정도 ‘출세’의 문제를 비켜간 채 ‘이념’ 위주로 흐르는 데에 있다. 어느 정도 출세를 한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발언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얽혀 있는 출세의 문제를 알게 모르게 외면하고 싶어 한다.
지금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左右)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선거철에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고위 공직을 출세로 간주하는 유권자들은 돌아가면서 나눠 먹으라는 ‘분배의 정의’에 투철하다. 선거 때마다 ‘물갈이’가 대폭 이뤄지면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지만, 물갈이의 주요 원인은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는 자신의 출세욕 충족을 위해 국민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유권자들의 시각이다.
출세욕이 나쁜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오늘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출세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가? 역설 같지만, 우리 모두가 출세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이 배가 아파서 그렇단 말인가? 그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출세 가치의 획일화와 서열화에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면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도 수단과 방법을 존중하고 소명에 충실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 남의 출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이지만, 정치는 기존 출세 가치를 바꾸진 못한다. 출세 가치를 바꾸지 못하면 정치는 출세의 수단일 뿐이라는 불신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딜레마다. 세월이 약이겠지만, 우선 고등학교에서 명문대에 학생 많이 보냈다고 뻐기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부터 중단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