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을 방문해 국립역사박물관에 들렀다. 거기에서 감동을 느낀 것은 굳이 그 유물의 작품성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비교가 가능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를 하자면 아랍 상인을 통해 먼 북유럽 오지까지 유입된 인도계 불상을 최상의 보배로 여겨 추장의 묘에 부장품으로 곁들인 바이킹의 거친 솜씨에 비해서야 신라 금관이나 백제 향로는 당대로서는 선진문물의 표징처럼 보인다.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이 박물관의 유물 배치법과 해설법이었다.
바이킹 유물 위주의 제1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천년 전에 이 땅에서 ‘스웨덴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큼직한 해설서부터 보였다. 그 뒤에는 수많은 지역 문화권들과 이민자들이 어떻게 해서 오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스웨덴 국민을 형성했는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극우파들이 어떻게 “영원불변의 민족” 신화를 악용해왔는지, 어떻게 바이킹 약탈자들을 영웅화시켜 스웨덴인에게 근거없는 “자긍심”을 고취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민족” 신화에 대한 관람자의 비판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이 박물관은 계급이라는 현실에 그들의 눈을 돌린다. 1600∼1700년 전 초기 철기시대의 북유럽 귀족이 애용했던 로마제국 유리잔 등을 전시하면서 “오늘날 부유층이 고급 해외 사치품에 대한 똑같은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내용의 해설서를 통해서다.
한마디로 이 박물관은 “민족”의 신화부터 계급의 현실까지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비판적 해부, 즉 회의의 대상으로 삼을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곳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이처럼 모든 것을 회의할 줄 아는 인간, 즉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준비가 돼 있는 인간을 양성할 만한 제도적 장치들은 존재하는가?
비록 요즘 중국·일본 유물도 같은 공간에서 전시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조선 때부터 존재해온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과시하는 역할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서울의 국립역사박물관을 탓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회의 중심적인 제도·기관들이 “회의 정신” 기르기에 전혀 기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게중심은 국가와 자본에 있는데, 특히 그들의 대외적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언론들을 과연 자주 볼 수 있는가? 예컨대 중동에의 원전 수출을 둘러싼 최근의 언론 보도 태도를 관찰해보기를. 실제로는 우라늄 채굴과 운반, 그리고 핵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방사능 누출의 위험성, 그리고 원전의 안전성 등에 대한 공방은 몇십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머나먼 옛소련의 체르노빌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 도카이촌 핵연료 처리시설에서도 10여년 전에 임계 사고가 나 2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은 바 있다.
그러나 문제덩어리인 핵을 비판적으로 해부해보는 목소리는, “수출 전선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난리법석 속에서 크게 들렸는가? 그 생명인 비판정신을 포기한 지 오래된 언론부터 회의할 줄 아는 시민이 아닌 국가와 자본의 무조건적 응원자를 키우고 있으니 박물관만을 떼어놓고 책임을 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인간이라는 사회적 동물은 계급사회의 테두리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지만, 그 상대적 자유의 가능성이라도 그나마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사회·정치·문화의 허실을 가릴 만한 회의 정신이다. 회의는 자유로의 길의 출발점이고, 그 길에 오른 사람만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성에 충만한 사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