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연구에서 한 가지 저명한 주제는 “유럽과 달리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 내지 사민주의 정당이 성공하지 못해왔는가”다.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의 개인주의와 노동운동의 상당부분을 포섭한 민주당의 역할을 칭송하면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전망 없다는 것을 자축하는가 하면, 진보주의자들은 급진좌파에 대한 국가 탄압의 역사나 인종·종족별로 쪼개진 노동계급의 분열을 한탄스럽게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진단을 내놓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친화성의 부족이 미국사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최근 십여년 동안의 경험을 회상해보면 한국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90년대 후반부터 사민주의적 지향의 진보정당이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만큼 국가 탄압은 완화됐지만, 진보정당의 역사는 주로 쓰라린 패배로 일관했다.
2000년대 초반에 일시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일으킨 바 있지만 그 후로는 진보정당들의 지지율이 침체돼 점차 소폭 내림세를 보일 뿐이다. 특히 저소득층이나 젊은층 사이에서 진보정당 지지가 미약하다는 것은 놀랍다. 성장이 둔화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부와 학력의 대물림이 일반화되는 한국에서는 진보정당의 정책비전이야말로 약자들의 이해관계에 안성맞춤이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주된 지지자들은 여전히 소수의 고학력자와 대기업 노조 조합원 등이다.
북유럽 복지국가를 선망하는 경향을 보이는 한국인들에게 토종 사민주의자들이 이렇게 호소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진보정치 부진의 사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급갈등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관념적이며 비현실적 민족주의를 내세워온 일부 정파들의 패권주의적 행위도 진보진영의 분열과 진보정치의 부진에 기여했다. 조합화되기 어려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조직성도 진보정치의 대중적 기반의 구축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이유들과 함께 사회심리적 이유도 지적돼야 한다. 사민주의는 약자들의 상호 신뢰와 연대를 기본 요소로 삼고 있지만, 한국적 풍토에서는 약자들끼리 서로 믿고 손잡아 함께 계급투쟁을 벌이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이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 이데올로기, 즉 한국인들의 “상식”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擬似)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다. 극도로 부패한 관벌·재벌의 지배하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거짓과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면서 정부나 사회 지도층도, 서로서로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타인을 일단 먼저 믿어볼 수 있다고 답하는 사람은 28%뿐이다. 그러나 늘 타인을 불신·경계해야 하는 폭력적 정글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그 폭력에 정면으로 저항하기에는 학교나 군대에서 폭력에 너무나 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저항한다기보다는, 그나마 믿어도 될 것 같은 가족·의사가족(선후배 등)과 튼튼히 뭉쳐서 폭력의 먹이사슬에서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려고 발버둥친다. 그것이 도덕적 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대다수는 이 세상에서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미 믿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냉소주의가 팽배한, 원자화된 사회에서 신뢰와 연대를 부르짖는 사민주의자들이 민심을 얻으려면, 그 연대 정신의 진지함은 약자들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학교 체벌 등 인권문제부터 철거민 투쟁이나 비정규직 파업까지 약자들이 싸우는 현장마다 당의 명운을 걸고 총력지원하는 것과, 약자들을 평상시 지원할 수 있는 풀뿌리조직을 확충하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저항의 현장마다 진보정당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면 결국 언젠간 한국에서도 진보정치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한국인들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냉소주의와 가족 내지 의사(擬似)가족 단위의 이기주의의 조합이다."
진보정치 부진의 이유는 "이처럼 냉소주의가 팽배한, 원자화된 사회에서 신뢰와 연대를 부르짖는 사민주의자들이 민심을 얻"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뭔가 2% 부족한 진단이자 해결방안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미 믿지 않는" 극도의 불신, 이기주의가 원인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그저 약자를 위한 일에 적극 앞장서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 약자인 철거민, 비정규직 파업 등 저항의 현장을 지원하는 일에 너무 매달린다는 인상은 이미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않나? 이 사회에서 약자는 그 '저항하는' 이들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