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가 되지 못한 ‘사과’에게 이상과 실생활 사이에서 흔들리는 진보파에게 보수 진영은 “왜 입으로만 떠드니?”라고 야유한다. 한 걸음씩, 조그만 실천을 할 방법이 있다. 2010.11.23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필자는 전형적인 ‘486 세대’이다. 1980년대 전반 군사독재 하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 속에서 진보의 가치를 습득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선배들로부터 가치를 숙지할 뿐만 아니라 체화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때 선배들이 종종 덧붙인 말이 있다. “겉만 빨갛고 속은 하얀 사과가 되지 말고, 겉도 속도 빨간 토마토가 되어라.”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관여하며 세미나, 농촌활동, 빈민 활동, 노동 야학 등에 참여했고, 졸업 이후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짧은 옥살이도 했고, 교수로 자리 잡은 후에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소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토마토’ 되기가 쉽지 않음을 항상 느낀다. 사실 이 말을 했던 선배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진보 정치나 시민·사회운동에 헌신하는 분들 중에서 겉과 속이 똑같이 빨갛게 된 ‘토마토’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필자는 ‘사과’와 ‘토마토’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음을 직시한다. 필자 같은 경험을 공유한 486 세대, 또는 자신이 진보를 지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생활에서는 진보의 가치에 완전히 부합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환경을 생각하면 1회용 종이컵이나 비닐봉지 소비를 줄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머그잔이나 천으로 만든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자원 고갈과 공기 오염을 생각하면 자가용과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야 하겠지만 편리함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 재벌의 문어발 확장 현상을 막으려면 집 가까이 있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이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종종 이용하게 된다. 다니는 직장에서 조직과 상사의 불법·부당한 요구에 맞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과 실천, 그리고 대규모 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선행에 감명받으면서도 집 장만하고 자식의 교육과 자신의 노후를 위해 저금을 하고 펀드에 돈을 넣는다.
자식 문제로 가면 더 어려워진다. 제도 개선은 멀고 자식의 패배는 가까우니 흔들린다.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 던져진 자식에게 더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못하지만 공부하지 말라고 하지도 못한다. 학원을 보냈다가 끊었다가를 반복한다. 특목고 가라, 명문대 가라고 윽박지르지는 못하지만 자식이 공부를 잘해 진보적 의식이 있는 명문대생이 되기를 바란다. 입시 경쟁으로 힘들어하는 자식 모습을 보면, ‘독수리 아빠’는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도 ‘기러기 아빠’나 ‘펭귄 아빠’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민하고 흔들리는 진보파 사람들에게 수구·보수 진영은 야유와 비난을 퍼붓는다. “너는 온몸으로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면서 왜 입으로는 그런 얘기를 떠드니? 그냥 조용히 있지 그래.” 또는 이렇게 말하며 유혹한다. “뭘 그리 고민하니? 머리와 몸의 괴리를 자초하지 말고 솔직히 네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충실히 살겠다고 말하렴.”
자식이 다니는 학원 한 군데만 줄이자
그러면 진보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겉과 속 모두에서 진보의 가치를 싹 없애고 ‘백색화’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다. 그 선택은 ‘정글의 법칙’에 대한 자발적 굴종이다. 두 가지를 해보자. 첫째, 개인적 갈등을 줄여줄 제도를 도입하도록 힘을 모으자. 예컨대, SSM이 골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자. 외고가 대입 명문 학교가 아니라 원래 설립 취지인 외국어 특성화 학교로 돌아가도록 만들자. 학력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고 대학 입시에서 지역·계층 균형 선발제를 도입하자.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어야 하기에 정치 참여에 나서는 것은 필수가 된다.
둘째, ‘사과’ 같은 개인의 삶을 직시하면서도 서서히 한 걸음 한 걸음 ‘토마토’ 같은 삶을 향한 조그만 실천을 해보자. 예컨대, 텀블러(휴대용 커피 잔)를 가방에 챙겨 넣자. 자식이 다니는 학원 하나를 줄이자.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브랜드 구두가 아니라 제화공 노동조합이 만드는 구두를 한 켤레 사서 신자. 주말 재래시장에 가서 좌판 깔고 물건 파는 아주머니로부터 물건 하나를 사자.
언행일치, 지행합일을 하는 ‘토마토’가 되기란 참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토마토’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떠랴. 각성과 추구,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의미 있지 않으랴.
쩝... 이 글을 읽는 독자 대상은 역시 '사과'들인가?
'사과'들에게... 겉이 빨간 걸 탈색해버리는 대신, 속까지 빨간 '토마토'가 될 수 있도록 자기 주위의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자, 라는 하나마나한 뻔한 이야기가 주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이며, 이미 다 자기의 입장에서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나만 해도, 1회용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쓰고 있고, 자가용은 커녕 면허도 아예 없고, 생활 속에서 삼성제품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다, 동네 구멍가게만 애용한다.
아, 물론 맞다. SSM이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다면 고민이야 하겠지, 저걸 이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그래서 그런 고민을 할 조건 자체를 없애는 일에 동참하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런데 그거랑 '사과'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건 '진보'도 뭣도 아니다. 그저 이 사회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상식'의 영역이지...
...
조국 교수는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자기 스스로가 '사과'임을 고백? 그게 뭐 대단한 일이길래? 설마 '토마토'인 줄 사람들이 잘못 볼까봐? 그건 지나친 착각 아닐까? 대한민국 사회에서 서울대 교수쯤 되려면 '토마토'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설마 대한민국에 있을라구.
많은 진보인사들에게 입으로만 떠든다고 하는 이유는, 단지 몸을 던져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은 모두 이미 "있는", 이미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겪어왔던 시대적 조건에서 그들은 이미 기득권자들이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대학생'이라는 이유 만으로도 사회적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시대적 조건,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 수 있었던 조건,
그리고, 커서는 '변절'했건 하지 않았건 안정적인 삶을 '쉽게' 꾸려나갈 수 있었던 조건.
지금의 20~30대는 결코 가져본 적도,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조건들.
그들의 말이 현실로, 피부로 와닿지 않는 이유다.
아, 그리고, 누가 '386'을 '486'으로 업그레이드시켜줬을까?
그들은 그저 '386'이었을뿐이다. 지금은, '과거 386이었던 40대'들일 뿐.
10년 뒤엔 586할건가? 20년 뒤엔 686? 쳇...
어물쩍 486으로 업그레이드를 시도하려는 모습은 살짝... 가증스럽다. 아, 이건 조국 교수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