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평전 - 실천문학사 (2001/01 14쇄) (읽음: 2001-07-01 09:51:10 PM)

- 장 코르미에 지음 / 김미선 번역

 

-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체 게바라에 관한 전문가로 알려진 장 코르미에는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을 실어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을 완성했다.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의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6년 7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해 11월 쿠바에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은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1959년 1월 결국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1년 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 게바라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결국 게바라는 1967년 10월 8일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체 게바라는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다. 검은 베레모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진보적인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여 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쿠바의 2인자 자리를 박차고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 등지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전장에서 숨진 게바라. 이 열정적 투사에 대해 당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하던 게바라의 모습은 가난한 민중들에게 성자로 추앙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체 게바라 열기는 그의 활동영역이 아니었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식지 않고 있다. '단지 그의 정치적인 입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라는 수많은 회고담 속에서 잘 드러나듯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체 게바라는 언제나 살아 있다. 쿠바의 한 지도급 인사는 '세월이 흐를수록 체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60년대라는 시대상과 그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간 게바라와 같은 인물을 다시 기대할 수 없는 이상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남을 것이다.

'죽은 게바라가 산 독재자를 물리친다'라는 말이 있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된 지 30여 년이 된 현재 그가 추진했던 혁명은 아직 미완일 뿐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바라의 죽음이 그 자체로서 남미 등 많은 지역의 반독재투쟁의 지표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게바라의 후예들'은 그가 직접 활동했던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는 물론 멕시코, 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 코르미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전기작가이다. 그 동안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저술을 써왔고, 체 게바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아왔다. 게바라에 관한 자료들을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는 체 게바라에 대해 남겨진 모든 자료들을 일갈해서 엮어놓고 있다. 체의 아버지를 비롯해 체가 살아 생전 관계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그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그가 남겨놓은 편지글이나 잡문들 거의 대부분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그 동안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은 수십 종이 출간되었으나, 67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더 이상의 체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을 만큼 체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이 책이야말로 '체 게바라' 전기의 최종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Yes24 책소개글)


- 무지무지 두꺼운 책인데, 친구(남규)가 선물한 책이랑 새로 산 책이랑 두 권이 있었다. 지금은 한 권을 친한 후배 누구(^^;)에게 줘서 한 권밖에 없지만. 


읽는데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됐다. ㅡ,.ㅡ; 

- 직전에 읽었던 그람시와 내용 면에서 많이 혼동되었다! 
이유인즉슨, 둘 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혁명'의 전선에서 20~30대의 나이에 활약한 희대의 걸물들이었고, 최근들어 다시금 재해석되면서 그 '인간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인물들이라는 점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창시자로서 그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예를 들어, '진지전과 기동전'...) 그 시대(1920~30)를 풍미했던 유럽의 '위험한' 지식인이었다면, 

- 체 게바라는 '전술적 게릴라'의 창시자(?!)로서 그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인품, 예리한 판단력으로 그 시대(1950~60)를 휘어 잡았던 라틴아메리카의 '위험한' 혁명가였다. 

- 물론 체 게베라를 단순히 혁명가라 표현하긴 힘들다. 의사, 혁명가, 게릴라 전술가, 쿠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에 외교관, 거기다 뛰어난 저술가까지... 얼마나 놀라운 인물인지 지금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인으로서 쿠바혁명에 참가하고, 아프리카의 콩고에 이어 볼리비아 혁명에 까지 뛰어든... 그의 놀라운 열정... 아메리카 대륙, 아니 나아가 전 인류에 대한 애정... 

-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전사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던 그의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에 가까운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진실은 당당하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를 두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게 다일까. 쿠바와 알제리 사이의 (자본주의적인) '상호호혜'를 넘어서는 '우정에 입각한 무역'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기층 민중을 사랑했던 혁명가였다! 

- 옛날 어느 책에선가 '좌파 게릴라'로서의 체 게바라가 요약된 글을 잠시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는 뛰어난 인물이었구나 하는 생각만 했었는데, 오늘, 그에 대해 다시 보게 된다. 우~~~와! @.@ 

- 피델 카스트로, 쿠바, 체 게바라... 미국에 이미 물들 대로 물든 우리의 뇌리에 그 이름들은 썩 좋지 않은 뉘앙스를 풍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얼마나 어리석었던 '세뇌'였었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




Posted by 떼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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